김주구 마을은 청대 동치 이전에도 여전히 왕양바다로 수억 톤의 진흙과 모래가 모인 서강 북강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광대한 바닷물이 점차 만 묘의 오아시스 모래사장으로 퇴적되었다. 금주 사람들의 조상은 비길 데 없는 용기와 불요불굴의 분투정신을 가지고 연이어 이곳에 와서 평저선을 타고 생계를 꾸려 논두집 옆에 초막을 세우고 살았다. 십여 세대의 번식을 거쳐 이 척박한 모래사장은 비옥하고 비옥한 논밭으로 개간되어 점차 강을 따라 양안의 띠 모양의 자연 마을을 형성하였다. 해방 후 비염향의 일환으로 한두대대에 합병되어 김주구 대대를 설립했다. 1984 1, 촌민위원회는 0, 1987 년에 설립되었다. 1993 남사 경제기술 개발구가 설립되어 모든 경작지가 징용된 후 마을에 김주구 관리구가 건설되었다. 개혁개방과 남사 개발건설의 동풍을 통해 마을당 지부는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짓는 역사를 끝내고' 부동산을 선두로, 공업을 바탕으로 공업무역을 병행한다' 는 집단경제발전길에 착수했다. 여일경제개발본사, 김주구 부동산개발유한회사, 건설공사 등 경제실체를 설립하여 별장과 다층주택 위주의 농민 신촌을 건설하였다.
2005 년 남사구가 설립된 후 김주구 마을은 반유구 (반유시) 를 이탈하고, 행정구는 남사구 0 남사거리 사무소에 소속되어 있다. 촌민 1267 명, 이민자 약 10000 명. 마을 안팎의 경제가 번영하고, 주택 임대, 공업 가공, 상업 및 서비스업이 왕성하게 발전하다. 호텔, 식당, 은행 우체국, 상점, 슈퍼마켓이 많아서 금항대로, 금사로, 원형 교차로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다차는 광저우로 직행할 수 있다. 김주구 초등학교, 구내초등학교, 김주구 병원, 지역사회병원 등 성숙하고 편리한 교통망, 지척에 있는 남사구 행정건물, 주변 남사시성, 오원해경성, 도예성, 해안가든 등 비즈니스 서비스 및 레저 주거센터는 김주촌에 무한한 기회와 밝은 발전 전망을 가져왔다. 남사구 당위와 남사거리 당위원회의 강한 리더십과 관심 지지로 금주 인민은 발전 기회를 꽉 잡고 역사적 부담을 버리고 사회주의 새 농촌 건설과 사회 화합을 촉진하는 중심 임무를 둘러싸고 사상을 더욱 해방시키고 진취적인 발전을 적극 추진하며 가공공업과 서비스업을 주도하는 2, 3 산업 발전을 적극 추진하여 산천이 수미, 이업이거, 화합 번영을 대대적으로 건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