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산국의 전신인 금산국은 처음에는 봉기군에 불과했지만, 이 봉기군은 당말에서 조정의 승인을 받았고, 주요 행사구역은 하서 복도였다. 나중에 당나라가 멸망한 지 2 년 후, 장승채봉은 금산국을 세웠다. 장정봉 건국의 초의는 중원 영토를 그의 조상 장의시대의 번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잘못된 판단으로 전쟁이 연이어 실패하면서 국력이 소진되었다. 그러나 조의진은 전쟁에서 이익을 얻어 세력이 계속 커졌다. 그래서 그는 장정봉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강요해서 금산 정권이 이상하게 지나쳤다.
둘째, 조의금의 숭불정책은 장승 숭불정책과 다르다. 조의진은 불교의 열렬한 주창자이다. 그는 금산 왕국의 황제가 된 후 많은 사람들을 배치하여 불경을 베껴 쓰고 막고굴 제 98 굴을 파고 있다. 이후 조의진의 아들 조원종이 권력의 정점에 올랐을 때 진산국의 각 계층은 조씨의 통치를 인정하고 각 부족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서북지역에서 유일하게 한문화를 보존하는 나라가 되었다. 한편 조 씨는 역대 불교의 발전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정치적 중심이 점차 불교로 옮겨갔다. 그러나 불사와 소불의 대량 재배로 국민들에게 끝없는 고통을 안겨 민족과 계급 갈등을 가중시켰다.
셋째, 금산 왕국의 멸망 금산 왕국이 100 년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조식이 역사 멸망의 교훈을 배우고 대외 확장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부족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지나친 숭배로 모든 방면의 불만을 불러일으켜 결국 서하에 합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