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헨리 왕자는 바다에 나가지 않고 14 15 년 동안 로얄 함대와 함께 모로코의 휴다에 갔다. 그는 왕 주앙 1 세의 셋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영국인이다. 어려서부터 조용하고 착실하며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며 설정한 목표에 몰입한다. 그는 선단과 함께 휴다에 도착한 후 많은 역사 문헌을 열심히 연구하여 귀중한 항해 자료를 축적했다. 그는 지구상에 아직 많은 미지의 대륙이 사람들이 발견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웅장한 비전이 그의 머릿속에 형성되었다. 그는 포르투갈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곧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휴다에서 돌아온 후 엔릭은 전심전력으로 항해 사업에 뛰어들었다. 호화롭고 편안한 궁정에서 벗어나 결혼과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포르투갈 남서쪽 구석의 황량한 산비센테 모퉁이 근처의 사그레스를 선택해 항해학교와 천문대를 설립했다. 그는 외국에서 유명한 우주학자와 수학자를 모집하고 수집한 대량의 정보를 연구했다. 그 후, 사그레스에 도크를 열어 배를 만들었다.
수년간의 연구, 훈련 및 준비를 거쳐 엔릭은 14 18 년에 선단을 파견하여 처음으로 출항했고, 그해 마드라 제도에서 산토스 섬을 발견했고, 이듬해에는 마드라 섬을 발견하였다. 나중에 그의 함대가 속속 아조레스 제도를 발견하였다.
엔릭은 1930 년대 이래로 당시 인간 항해의 한계에 도전해 왔다. 그는 포르투갈의 일류 탐험가와 용감한 선원을 정성껏 골랐다. 그의 세심한 계획과 배치 아래, 이 충성스러운 선장과 선원들은 기니, 세네갈, 카보베르데, 시에라리온을 연이어 발견했다.
사료에 따르면 엔릭은 그의 선장에게 발견된 땅의 원주민들과 화목하게 지내라고 여러 차례 호소하며 그곳에서 평화로운 식민지를 주장했다. 이것이 나중에 사람들이 지리대발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중에, 금을 찾아 노예를 파는 등 물질적 이익에 이끌려 포르투갈 왕실은 항해대발견을 무력정복과 약탈로 바꾸어 잔혹한 식민통치와 억압으로 변모시켰다.
15 세기 상반기에 포르투갈 항해 발견의 성과는 유럽을 놀라게 했다. 엔릭은 포르투갈인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유럽인들은 그를 항해가라고 불렀고, 포르투갈 사람들은 그를 은릭 왕자와 항해 왕자라고 친절하게 불렀다. 인류에 대한 그의 공헌은 항해가의 위대한 업적을 훨씬 능가한다. 포르투갈 역사학자 해메 코르테스오 (Jaime Cortesao) 는 이 사건의 세계적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과거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즉, 포르투갈 사람들은 다른 민족의 과거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고, 그 결과는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크게 촉진시켰다.
포르투갈인들은 엔릭에 대한 사랑과 숭배가 너무 높아서 그의 이미지가 신성하게 여겨졌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순수하고 엄숙한 수도인물로, 개인의 모든 감정과 욕망을 버리고, 사소한 일로 귀중한 시간을 빼앗지 않고, 자신의 항해 생활을 지체하지 않는다고 한다.
엔릭 1460 은 그의 범선 기지 사그레스에서 66 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역사가들은 그의 생활과 경력의 중요성이 포르투갈과 유럽 전역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논평했다. 그가 항해한 이후로 중대한 지리적 발견을 한 모든 사람들이 그의 발걸음을 따랐다.
그에 대한 영원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포르투갈 사람들은 그를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돈 알폰소 엔릭 친왕 훈장을 세워 포르투갈에 기여한 국내외 문화 인물을 표창했다. 헨리 왕자의 이름은 포르투갈의 항해 경력과 위대한 항해 발견과 영원히 연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