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부의 전기", 특히 소악부의 작품과 같은 중고 자료를 보는 것이 좋습니다. 진래의 책도 일정한 참고가치가 있다. 정말 원작을 직접 보고 싶다면 독후감과 송론이 최선의 선택이다. 우선, 역사 작품에는 구체적인 개념이 별로 없고 그 자체가 이야기라 읽기가 재미있다. 그리고 선산 선생의 견해는 고명하고, 논점은 저속한 유가와는 달리, 늘 눈을 크게 뜨게 한다.
왕부지 (16 19-1692, 즉 만력 47 년-강희 31 년), 왕야평 (오늘 형양시 기러기 봉구) 사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상가, 철학자, 역사학자, 문학가, 미학자 중 한 명이 호남문화의 정신적 원천이다. 그는 헤겔과 함께 동서양 철학의 쌍둥이 별이라고 불리며, 중국의 소박한 유물주의의 집대성자이자 계몽 운동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는 황종희와 함께 명말 청초의 3 대 사상가라고 불린다. 만년에 석천산에 은거하여 석두 같다. 그는 선산병부로 남월 유민이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를' 선산선생' 이라고 부른다. 그는 일생동안 저술이 꽤 풍부했는데, 그중에서도' 자치통감' 과' 송론' 이 그의 대표작이다. 왕부의 일생은 경세치용을 주장하고, 주성의 이학을 단호히 반대한다. 그는 "육경이 내가 새로운 얼굴을 열었다고 비난하고, 7 피트는 나에게 하늘에서 생매장해 달라고 간청했다" 고 자칭했고, 작품은 후세에 의해' 선산전서' 로 편성되었다. 왕부의 주요 공헌은 철학 사상과 역사관에 있다. 철학적으로, 그는 신유가의' 지행통일' 인식론에 반대하며 선각 후행유물주의 지행관을 제기하고,' 행과 지식을 겸할 수 없다' 고 지적하며,' 행' 즉 실천이 인식에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는 또한 변화된 변증사상을 제기하고, 이학이 정적을 다스리는 사상을 반대하며,' 정적자는 아직 움직이지만, 조용하지 않다' 는 명제를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