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 회사기업대전 - 정보화 관리 자문 - 성시 중원의 창시자는 누구였나요?

성시 중원의 창시자는 누구였나요?

사회적 혼란이 이미 나타났을 때 국기를 게양할 시기를 어떻게 선택하나요? 영웅이 공존하고 정치 프로그램이 폐허가 되었을 때 혼란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나요? 중대한 법정 사고가 발생했을 때 남을지 떠날지 어떻게 결정하나요? 당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당고조 이연은 이러한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수나라 말기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다양한 정치 세력이 서로 경쟁했습니다. 수나라 때 태원에 머물렀던 이연은 재능이 뛰어나고 사려 깊었습니다. 그는 적절한 시기에 출발하여 관중에 정착하여 그룹을 정복하고 단결, 혁신 시스템을 재건하고 당나라 통치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말년에는 '서안문 사건'으로 인해 2선으로 물러났지만 시대상을 파악하고 상황을 이해하며 결국 좋은 최후를 맞았습니다. 건국 황제들 중에서도 그는 지도자였습니다.

관룡에서 태어난 당나라 황제 이연은 초기에 꽤 유명하고 성공적이었습니다. 양제의 말년에 태원에 남겨진 그는 때마침 장안을 점령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때가 되자 그는 결단력 있게 '선(禪)을 취해' 당나라를 세웠습니다.

이원은 원래 룽시성 지청(현 간쑤성 진안) 출신으로, 전국시대 오량왕 이괄의 일곱 번째 손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천시 투두와 아버지 팡 리는 모두 북주 왕조의 영웅으로 당나라 공작을 봉인하고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리원은 일곱 살 때 당나라 공작의 직함을 공격했습니다. 젊었을 때 이연은 온화하고 관대하며 관용이 많았고 관룡 가문 출신이라 꽤 유명했습니다. 그의 아내 두시는 수나라 귀족인 선우두이 공작의 딸이었고, 수문왕조의 두구 황후는 리원의 고모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수나라 원제는 재위 기간 동안 (현 안휘성 보현), 롱저우(현 산시성 롱현), 저우치(현 산시성 펑샹현)의 암살자를 역임했습니다.

대예 13년(617년), 이연은 타이위안에 머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천하의 혼란은 분명했습니다. 타이위안은 수나라의 군사적 중심지로서 병력이 풍부하고 식량이 풍부했습니다. 리원은 당연히 매우 행복했습니다. 태원에 머무는 동안 그는 적극적으로 세력을 키우고 큰일을 도모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5,000~6,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전저가 이끄는 수만 명의 농민 반란군을 물리쳐 군사 지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군사력을 크게 강화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진양 사신 유문정, 사신 리원, 탕젠, 후벤 세례자 등 진양 지역의 관료, 지주, 상인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의 장남과 차남도 각각 허동과 진양 지역에서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해 2월, 마이 출신인 유우주가 일어나 자신을 하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총독 왕릉공(王陵公)을 죽였습니다. 당고조는 유우주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직접 군사와 말을 모집했고, 이세민과 유문경도 당고조의 지휘 아래 군사를 모집했습니다.

당시 국내의 혼란과 분열에 직면한 이시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원에게 공개적으로 천하를 위해 싸울 것을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당가오는 너무도 신중한 태도를 보여 쉽게 깃발을 들지 않았습니다. 역사에 따르면 당고조가 결심을 굳히도록 하기 위해 이시민의 지휘를 받은 태원은 진양궁의 관리인 유문정과 페이지에게 명령해 당고조를 취하게 하고, 그 틈을 타 양디가 아끼는 두 후궁(대신과 황제가 아끼는 후궁은 용서할 수 없는 중죄)을 잠자게 해 당고조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사실 당고조가 너무 일찍 전쟁에 나서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힘을 키우고, 혼란 속에서 상황을 판단하고, 기회가 왔을 때 단호하게 행동하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입니다. 이연이 어느 정도 군사력과 정치력을 갖추었고 나라의 상황이 군대를 일으킬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이 되었을 때, 그는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그는 분명 그냥 머물러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고조가 세력을 키우고 있을 때, 태원부사 왕위와 고준야는 당고조가 유비를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군사를 모집하는 것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사회에서 떠돌던 이씨 가문이 나라를 장악하려 한다는 소문을 양디는 매우 경계했습니다. 왕과 가오는 그들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왕과 가오가 터키의 전쟁 준비 부장과 공모했다는 명목으로 재빨리 왕과 가오를 체포했습니다. 갑자기 투르크의 침략에 찬성하는 왕위와 가오의 내기를 걸고 왕위와 가오준야를 즉시 죽였습니다. 이후 투르크와 화친을 선언하고 유문정을 투르크에 망명하도록 보냈습니다. 투르크 칸은 좋은 말 수천 필을 태원에 보내 이연과 교역하고, 이연을 서쪽 수도 장안으로 호위할 군사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투르크족의 약속을 받은 리원은 아무런 걱정 없이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수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로운 군대'를 창설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진양에서 봉기한 후 이연은 관중으로 진군하여 장안을 점령하여 천하를 장악하고 큰일을 계획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 시허의 치안 판관인 고더루는 이연의 말을 듣지 않고 이연을 보내 시허를 점령하고 고더루를 사로잡았습니다. 시허를 함락한 후 이연은 장군의 거처를 마련하고 장군 행세를 하며 이연을 삼군 사령관으로 삼고 관리도 페이지, 유문정, 인개산 등으로 임명했습니다. 대예 13년(617) 7개월에 넷째 아들인 이연지를 태원에 머물게 하고 직접 관중 서부의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회이, 린펀, 장군(현 산시성 장셴현), 펜인까지 황하를 건너 현실을 피해 가상의 장안을 직접 가리켰습니다. 이때 당 고조의 딸인 진양공주는 수만 명의 군대를 모집하여 연합군에 합류했습니다. 대예 13년(617년) 11월, 이연과 그의 아들들은 2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장안을 공격했습니다.

장안에 입성한 이연은 국고를 봉인하고 책을 숨기며 약탈을 금지하도록 명령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수나라 양강왕이 공디라는 황제로 즉위하자 원나라는 양디를 최고 황제로 추앙하는 대신 이녕으로 호칭을 바꾸어 여전히 재상의 도리를 지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가짜 황전으로 자신을 봉하고 제후가 되어 내외 군사의 총사령관을 역임하고 재상을 지냈으며 당의 왕으로 승진했습니다. 그는 우두궁을 총리 관저로 삼아 정사를 관장하는 관리들을 세우고 군사권을 독점했습니다. 장남은 태자, 차남은 진의 왕, 넷째 아들인 이연지(李延之)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 동안 그는 큰 업적을 쌓고 민심을 얻었으며 국정을 독점했습니다. 대예 14년(618년) 다섯 번째 달에 양제는 황제의 칭호를 주장한 장도의 유무제에게 살해당하고 도안데에게 붙잡혀 죽었습니다. 이때 당 고조는 때가 무르익어 수나라 양디 황제의 방패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나라 공디 황제는 왕위를 물러나 태자당에서 "명상"하고 국호를 당나라로 정하고 우데와 장안을 수도로 변경했습니다. 진양에서 장안으로 옮긴 지 1년여 만에 리당 왕조가 세워졌습니다. 물론 이것과 이연이 수나라의 농민 반란이 끝나고 지배 집단 내부의 세력 발전의 격차를 영리하게 이용하여 구 왕조의 정통성의 깃발을 먼저 세우고 모순을 이용하고 적의 경쟁을 좁히고 인재를 잘 활용 한 것은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농민 반란군, 내부 분열 세력의 전 지배 집단, 전국 각지의 소수 세력에 맞서.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이연은 기회를 포착하여 이들을 하나씩 정복하고 마침내 수나라의 폐허 위에 통일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당나라 장안에서 리원이 황제로 즉위했을 때 당나라는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정치적 야망이 있었던 이연은 관중의 한 귀퉁이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곡식과 옥수수를 비축하고 나라를 통일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 군대를 준비했습니다.

첫 번째 목표는 관중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서주와 서애였습니다. 서주는 원래 수나라 진성현(현 간쑤성 란저우) 출신의 부자였습니다. 대예 13년(617년) 천하가 혼란에 빠진 것을 보고 수나라 관리들을 추방하고 스스로 서진의 패자라 칭한 뒤 곧 황제의 칭호를 받고 수도를 천수로 옮긴 뒤 아들 서서를 제환공으로 세우고 13만 대군을 이끌고 관중의 중심을 내려다보며 영서 전역을 점령했다. 이연은 6,543,800여 명의 병력으로 장안을 점령하고 서주 부자를 진격하여 심각한 위협을 가했습니다. 당 고조는 이시민을 출병시켜 서주의 군대를 물리쳤고, 무제 원년(618) 5월, 이원이 장안에서 황제로 즉위하자 서주는 기병대를 이끌고 그의 군대를 괴롭히고 사로잡아 장안을 직접 점령할 생각으로 당군을 무찔렀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서주는 죽고 그의 아들 서희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를 기회로 삼은 당의 고조는 진나라의 왕 이시민을 원수로 임명하고 다시 한번 군사를 이끌고 서나라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서고려는 이시민에게 패하여 당나라 군대에 항복했고 이때부터 영서는 당나라의 영토로 편입되었습니다.

무제 2년(619년)에 이괄의 정권은 전복되었습니다. 양주의 유명한 재상이었던 이계는 수나라에서 무제의 재상이었습니다. 수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이괄은 한 거물과 결혼하여 내원시를 정복하고 스스로 양나라의 왕이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당나라와 서나라 군대가 전쟁을 벌이는 동안 이괄은 천자라는 칭호도 얻었으며, 장예와 둔황 등 강 서쪽에 다섯 개의 현이 있었다는 소문이 전해집니다. 이연은 천하를 통일하고 싶었기 때문에 당연히 혼자라는 이귀의 주장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괄의 집안의 우두머리인 안서륜의 동생 안귀를 몰래 냉궁에 들여보내 이괄의 신임을 얻어 좌우장수로 임명했습니다. 무제 2년(619년), 안의 형제는 이귀를 이기지 못하고 감기에 걸려 죽었습니다. 하서의 다섯 현은 당나라에 편입되었다.

3년(620)에 무제는 유우주를 물리쳤습니다. 유우는 수나라 개미(지금의 산서성 수오현)의 양영부(楊英夫)의 중신이었다. 무예 13년(617년), 같은 현의 장완수 등과 함께 총독 왕릉공을 죽이고 1만여 명의 군사를 모아 총독에 오른 뒤 투르크족이 루소(지금의 산서성 징글현), 연문, 딩샹(지금의 내몽골 청허현) 등을 점령하자 곧 황제로 즉위했다. 무제 2년(619년), 유우주는 거란과 결탁하여 허저우(지금의 진양) 남부를 침공했는데, 당나라 허저우의 총관 이원지가 그에게 패하여 태원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당 고조는 오른팔 신하를 보내 페이실의 총독을 쏘게 했지만 역시 패배했습니다. 유비는 태원을 진격하고 이연지는 장안으로 도망칩니다. 유비의 군대가 서안과 푸산 지역에 도달하자 관중 지역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 고조는 이세민에게 군대를 이끌고 롱먼(현 산시성 한성현)에서 강을 건너 유우주를 공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유우주를 공격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시민은 강을 건넌 후 말을 준비하기 위해 전투를 멈추고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적이 식량을 주지 않자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유우주를 물리쳤습니다. 유우주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터키로 도망쳤으나 나중에 터키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북서쪽의 3대 지배 세력이 멸망한 후 관중의 상황은 안정되었습니다. 이연은 중앙 평원을 위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왕은 중앙 평원의 군주였습니다. 왕은 수나라의 장두의 수호자였습니다. 양황제가 죽은 후 왕은 양동을 장도의 황제로 세우고 와강 군대를 물리쳐 많은 장수가 항복하게 했습니다. 무제 2년(619년)에 왕사충은 양동을 폐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어 낙양을 점령하고 하남의 최대 통치 세력이 되었습니다. 무제 3년(620년) 이연은 낙양을 공격했고, 하남 왕의 군현들이 차례로 당나라에 함락되었습니다. 전세가 역전된 것을 확인한 왕은 2,000여 명의 관리들을 이끌고 당나라에 항복했고, 하북성의 현들도 연이어 당나라에 항복했습니다. 당나라는 기본적으로 황하 유역을 장악했습니다.

중원 평원을 차지하기 위해 분투하던 이연은 이징을 구이저우(현재의 쓰촨성 펑제현)로 보내 장강의 중하류를 점령하고 있던 샤오셴현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샤오셴은 수나라의 관리이기도 했습니다. 무제 원년(618년)에 발령에서 황제로 즉위한 그는 곧 수도를 장릉으로 옮기고 40만 명이 넘는 병력으로 바, 촉을 공격했습니다. 무제 4년(621년), 이징과 리징이 장릉을 포위하자 샤오셴은 패배하여 당나라에 항복했습니다. 양쯔강 중하류도 당나라가 점령했습니다.

위와 같이 수나라 집권 세력이 하나씩 단절된 후, 이연은 남은 농민 반란군의 주력을 향해 선봉을 겨누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임무는 와강군을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와강군의 지도자는 리미와 두지안데였습니다. 리미는 봉건 사회의 학자였습니다. 두견더가 와강군의 봉기를 이끈 후, 리미도 그를 따라가서 지도자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이미는 당고조와 이시민과 교유했습니다. 장안으로 진군할 때 이미는 수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 * * *를 사용하자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고자는 전세를 고려해 목소리를 낮춰 감사의 뜻을 전하고, 이미의 군대가 낙양으로 동진하는 수나라 군대를 막고 장안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이미를 대장으로 밀어주는 척했습니다. 이미의 견제 덕분에 수나라 군대는 장안으로 서쪽을 바라볼 시간이 없었고, 그 덕분에 당고조는 장안으로 순조롭게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왕이 와강군을 물리친 후, 이미는 당나라에 항복하고 3년(620년) 동안 무사가 되었습니다. 왕과 중앙 평원을 놓고 경쟁하던 중 두견데가 이끄는 와강군이 왕의 요청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이시민에게 패배한 두견대는 용맹을 떨쳤으나 당고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두견대가 살해된 후 그의 장수들은 유해수를 주축으로 장남(현재의 산둥성 더저우)에서 당나라와 싸웠고, 두견대가 지휘하던 지역을 완전히 복구하는 데 반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무제 5년(622년), 문주(현 하북 영년)의 유헉수는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하며 당군을 거듭 물리치고 나중에 리 왕세자가 직접 유헉수를 원정했고, 리는 제안을 채택하고 회유 정책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유헉수의 군대를 붕괴시켰습니다. 무제 6년(623년), 유비는 마침내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 죽었습니다. 당 왕조는 허베이와 산둥의 땅도 장악했습니다.

두가 이끄는 농민 봉기는 장화이 주변 지역을 점령했는데, 이 지역도 당나라의 장애물이었습니다. 대예 13년(617년), 두는 리양(지금의 안휘성 하서현)에 들어가 스스로 총사령관이라 불렀습니다. 무제 원년(618)에 수도를 단양으로 옮기고 당시 수월의 왕이었던 양동은 안남로 총사령관 겸 초의 왕이 되었습니다. 당나라 군대가 낙양을 포위하자 두를 정복하고 두를 태자로 삼아 렌과 회남의 사신들을 평정했습니다. 유해수가 패배하여 죽자 두는 외무부를 단양에 머물게 하고 자신을 조정으로 초대했습니다. 당 고조는 이 기회를 틈타 두 부위를 떠났습니다. 6년(623년) 가을, 단양의 부차는 송나라의 황제라고 주장하며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에 대항했고, 당나라는 이 기회를 틈타 두를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장군 리와 이징을 보내 단양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무제 7년(624년), 부차는 지주들에게 붙잡혀 참수당했습니다. 이 무렵 강남과 회남은 당나라의 관할이 되었습니다.

당나라 공격의 최종 목표는 량이었습니다. 량은 수나라의 관리이기도 했습니다. 대예 13년(617년) 수나라의 수방에서 수나라와 싸워 도양, 홍화, 연안현을 점령하고 황제를 자처하는 양나라를 세우고 거란에 붙어 '하늘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태종 정관 재위 2년(628년)에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이때 이연과 그의 아들은 봉건 세력을 합병했을 뿐만 아니라 농민 반란을 정복하고 다시 한 번 나라를 통일했습니다.

이원은 당나라를 세운 후 나라를 통일하기 위해 군대와 말을 조직하여 전쟁을 치르는 동시에 수나라의 흥망성쇠에서 얻은 교훈을 정리하고 다양한 제도를 제정하여 당나라 초기의 당나라 통치를 위한 일정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수나라가 개발한 다양한 제도는 대부분 그 자체로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행 후기에 문제가 발생하면서 불만족스러운 측면이 많았고, 현실 상황의 변화로 인해 일부 제도 자체에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당나라 초기에 이연은 내정에서 모든 것을 직접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따라서 통일 전쟁과 함께 많은 봉건 제도를 우선순위를 정하고 재정비해야 했습니다.

수나라 말기에는 형법이 폐지되었는데, 이는 통치자들에 의해 남용되어 백성들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연은 장안을 점령한 후 한나라의 고조 유방을 본받아 12개의 민사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당나라 황제로 즉위한 후 그는 '대상법'의 폐지를 선언하고 페이지, 유문정 등에게 수문제의 '황제개법'에 따라 법을 수정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은 간단하고 편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무제 7년(624년)에 익기는 새로운 법률인 '무제법'을 공식적으로 공포했습니다. 우데법은 대략적으로 카이황법을 모델로 삼았으며, 새로운 법에는 53개의 새로운 예만 추가되어 수이법보다 처벌이 가벼워 중앙집권적 통치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더해진 법입니다. 이 법은 그다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정부와 백성들이 따르게 만들었고 이후 정관법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당나라 초기에 이연은 수도와 지방에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채용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당시 어느 정도 세력을 가지고 있던 귀족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무제 7년(624년)에는 수나라가 폐지했던 중정(中正官)을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북주(北周)와 북제(北齊)의 제도에 따라 각 주마다 대정 관리가 임명되고, 주 서중이 관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종은 대부분 명예직이었으며 인권의 사용은 주로 만다린의 사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만다린들이 인권을 사용하는 주된 방법은 수나라가 만든 황실 시험 제도를 통해서였습니다. 이 제도는 수나라의 그것과 비슷했지만 황실 시험이 더 중요했습니다. 보통 황실 시험을 주재하는 것은 세입부 장관이었습니다.

수나라 말기의 전쟁으로 인해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무두 시대 초기의 전국 가구 수는 약 200만 가구에 불과했는데, 이는 수나라가 번성하던 시절의 1/4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였습니다. 당 고조는 유배된 인구를 조속히 귀환시켜 생산을 회복하고 국가 세수를 늘리기 위해 북위와 수나라 때부터 존재했던 토지 균등화 및 소작료 제도를 당시 실정에 따라 약간의 가감만 가한 채 도입했습니다. 토지 질서의 평등화에 의해 발행 된 우데 7 년 (624 년)부터 이전 세대보다 제한 시스템에서 토지 판매의 우데 평등화가 완화되어 토지 합병의 추세와 현실에 직면 한 봉건 국가가 "녹색 신호"를 켜야 함을 나타냅니다 : 일반 여성과 노예 소녀는 더 이상 토지를 부여하지 않으며, 여성의 노예 해방은 노예 소녀의 수가 크게 감소하고 더 이상 농업 생산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지 않으며 상인과 상인, 상인, 상인이 더 이상 점유하지 않습니다. 지배력; 상인과 상인, 승려, 수녀, 도교 사제, 여성 왕관 (즉, 여성 도교 사제)도 토지, 눈에 보이는 상인, 집주인 및 사원 권력을 부여했습니다 무시할 수 없습니다. 토지 부여 특권 측면에서 관료 귀족의 경우, 그 조항은 약간 다른 정도만 다를 뿐 시대에 걸쳐 일관되게 적용되었습니다. 토지의 평등화를 바탕으로 지대와 소작 제도는 계속 유지되었지만, 소작을 노역으로 대체하는 조건은 수나라에 비해 완화되었습니다. 수나라에서는 50세 이상이면 노비 대신 노역을 할 수 있다고 규정했지만, 무통에서는 연령 제한을 없애고 최대 노역 기간을 정했는데, 이는 분명 경솔하고 관대한 조치였습니다.

수나라 말기에는 내전이 발생하여 통일된 관군 제도가 파괴되었습니다. 태원에서 일어났을 때 3만 명에 불과했던 이연은 장안에 도착했을 때 2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 군대를 당나라로 데려와 군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연은 이 군대를 점차 공식 군대에 편입시켰고, 이 군대는 점차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무제 원년(618년), 이연은 즉시 수나라를 완전히 따르는 군부를 설치하고 공훈이 있고 하급 병사를 위나라의 장군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열두 군대의 장군은 일반적으로 나팔수였고, 실제 지도자는 두 명의 장군, 즉 기병과 전차병이었기 때문에 통제가 쉽지 않았습니다. 무제 2년(619년)에 십이군이 설치되고 관중의 현이 십이군에 배정되었으며, 관중은 십이군에 해당하는 열두 길로 나뉘었고 각 길에 기병과 전차병이 배치되었습니다. 열두 군대는 당나라 초기 관중에서 보다 고정된 기본 경비 부대였습니다. 각 군대에는 쟁기질 전쟁을 감독하는 장군과 대리인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보통 집에서 출산하고 비수기에는 군청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보다 정기적인 임무는 '팡상'으로 알려진 교대로 수도에 머무르며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에 참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부군은 복무하는 동안 집세는 면제되었지만 전쟁에 나가면 무기, 의복, 식량을 직접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관군제도가 토지의 평등화에 기초한 군사제도, 즉 농업에 군인, 즉 군인 안에 자본(군사 자본)이 포함된 군사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당나라의 건국 황제였던 이원의 말년은 비난을 받을 만했습니다. 그가 '서안문 사건'과 관련이 있긴 하지만, 봉건 시대에는 이런 사건이 흔했습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리원이 현 상황에 적응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는 말년을 행복하게 보냈습니다. 이것은 건국 황제들 사이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나라 건국 후 리원의 통치 기간이 짧았고 후계자가 명성이 높은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업적 중 많은 부분이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사라졌다는 의문을 제기한 중국 역사 전문가를 비롯한 일부 현대 역사학자들은 리원의 업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리원은 오랫동안 평범하고 무능한 인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주관적인 편견이 없는 한, 신중하게 수정된 역사 자료에서도 리원이 위대한 세대의 창시자로 간주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늦은 나이입니다.

봉건 황제로서 리원은 당연히 봉건적 특권의 궁중 생활을 했습니다. 몇 년간의 무공 재위 기간 동안 후궁을 사랑하고 때로는 부주의한 정치를 했으며, 페이 실크의 비방을 듣고 실수로 유문정을 죽이는 등 나쁜 행동도 있었습니다. 역사책에 따르면 무제의 해에 이세민이 낙양을 평정한 후 황후와 다른 사람들을 낙양으로 보내 수나라의 궁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보물창고에서 보물을 찾게 했다고 합니다. 황후와 다른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이시민에게 친척을 위해 귀중품과 관직을 요청했지만 불만족스러워하자 이시민을 거절했습니다. 나중에 회안 왕 때문에 이신통은 큰 업적을 세웠고, 이시민은 "가르침"(진나라의 왕)의 형태로 아벨 타마타가 수십 헥타르를 나누었습니다. 장자유의 아버지(이연의 배우자 중 한 명)도 장자유를 통해 이 땅을 요구했고, 이연은 그에게 주었습니다. 리신통이 자유의 아버지에게 주지 않은 것은 이전에 리시민이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장자유는 이원 앞에서 "황제가 아버지에게 밭을 주었는데 진왕(이시민)이 빼앗아 회안왕에게 주었습니다!"라고 불평했다. 이연은 이유를 묻지 않고 화를 내며 이시민에게 "내 손은 당신이 가르쳐준 손만큼 쓸모가 없습니까?"라고 비난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은 나쁘고 봉건 황제들 사이에서 특별히 나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원에게는 칭찬할 만한 점이 많습니다. 특히 그는 사람을 중시하고 잘못된 가르침에 집중했습니다. 무제 때 완연현 파조순은 수나라의 죽음을 거울삼아 이연의 사치를 직설적으로 비난하고 황태자와 왕의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주변 인물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말은 솔직하고 숨긴 것이 없었지만 여전히 상당히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이연은 시계를 보고 이치에 맞는 말이라며 기뻐했습니다. 그는 표창을 내리고 손권을 서차로 승진시키고 비단 300필을 하사하며 사람들이 감히 솔직하게 말하도록 독려했습니다. 훗날 당태종 정관원이 하부를 겸손하게 한 것도 이연의 영향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아버지로서 리원은 당연히 무제 말기 '서안우문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일부 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건은 봉건 시대에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처음에 리원리의 장남 리젠이 왕자가 된 것은 봉건 사회의 기본 원칙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책에 따르면 그는 이시민에게 왕자를 세우겠다고 맹세했다고 합니다. 믿지 않으면 잃을 것이 없고, 믿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당시 이시민의 재능과 업적을 고려할 때 아버지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그가 후궁과 대신들의 비방하는 말을 듣고 황태자와 원제를 익사시키고 백성의 안전을 위태롭게 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공식 역사에 따르면 이원이 다음날 아들들을 불러 옳고 그름을 판단하겠다고 말한 전날에 '서안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리시민의 행동이 너무 빨라서 나이프조차 예상하지 못했다는 뜻일 뿐입니다. 리원은 리시민이 동생을 죽였다는 보고를 듣고 너무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한 후 "반란군이 동생을 죽일 줄은 몰랐다!"라고 화를 내며 말했다. 이때 옆에 있던 샤오유가 "화를 진정시켜 주십시오. 황태자(이)와 제나라 왕(이연지)은 모두 진나라 왕(이시민)만큼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 진왕에게 모든 국정을 맡기시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입니다." 당 고조는 화가 났지만, 나무가 나무로 변했다는 사실 앞에서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하고 대세를 따랐습니다. 그는 더 이상의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당시 모든 군대에 진왕의 명령을 따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해 6월 7일에는 이사를 황태자로 임명했고, 8월에는 이사에게 양위하고 '최고 황제'로서 은퇴했습니다.

이원은 최고 황제에서 물러나 태안궁으로 거처를 옮긴 후 더 이상 국정에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세민으로부터 오랜 기간 예우와 존경을 받은 대가였습니다. 정관 7년(633년) 겨울, 이세민은 웨이양궁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고 당고조를 초대해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고추는 매우 공손했습니다. 당고조가 기뻐하자 그는 투르크족 리제 칸에게 춤을 추게 하고 나만 족장에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세민은 또한 직접 술잔을 들고 당고조에게 술잔을 선물하며 지금의 월후 가문과 네 오랑캐를 정복한 것은 모두 노인의 가르침의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당 고조는 자신이 또 다른 황제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에 만족했습니다. 당 고조는 이세민이 큰 그림을 장악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사를 무시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어 기뻤습니다. 이러한 태도와 관행은 당시 조정의 갈등과 투쟁을 줄이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시민의 재능이 발휘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정관 9년(635) 5월, 이연은 중병에 걸려 태안궁에서 죽었고, 71세의 나이에 가오주(高祖)라는 호를 받고 셴링에 묻혔습니다. 건국 황제인 당 고조 - 당 고조는 자연사로 사망했습니다.

copyright 2024회사기업대전